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전국에서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퍼졌습니다.
지금 처럼 통신망이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는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 일까요?
아래는 '한국 기독교교회사 - 민경배 지음'의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 9년째 되던 해, 1919년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물론 한국 민족 전체의 거족적 운동이었고 또 천도교나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 단체가 선도한 것이 사실이었다. 조선조의 정통에서 항상 이단시되던 신앙으로 늘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의 종교들이 주동이 된 3.1 운동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참된 근대 한국, 민주 한국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민족 운동의 핵심과 다이내믹스는 기독교회를 경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독립운동의 시작은 사실상 기독교였다. 일본 동경의 한국인 YMCA(기독교청년회)에서 타오르기 시작해 1918년 12월 30일 이종근, 윤창석, 최근우, 서춘 등이 구체적으로 한국 독립에 관한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 6일에는 다시 YMCA에서 전영택을 더한 상기인들이 "현하의 정세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는 최적당한 시기로서 해외의 동포도 기히 각각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음으로써 우리들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의 개시"하여야 한다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이때 실행위원 9명을 선출하고 이광수로 하여금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작성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3월 8일 낮 2시 동경 한국인 YMCA에서 '조선 청년독립단' 대회를 개최하고 우뢰와 같은 박수로 "2.8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 윤창석이 '신의 가호와 보우'를 기도함으로써 폐회하였던 것이다.

 이 동경 YMCA에서의 독립운동이 국내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자극과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의 국내 유입 통로는 상해 거류 한국인의 서북 지방 왕래와 동경 YMCA 독립운동계의 국내 연락 등 두 통로였다.

 이 "2.8독립선언" 그룹이 국내 운동에 연락된 경로는 송계백을 통해 송진우, 최린, 손병희 접촉을 잇는 독립운동 계획의 성사, 최근우를 통한 국내 기독교와의 연락, 그리고 김마리아를 통한 호남, 관동 지역에의 여자 운동층과의 연결이다.

 국내에서의 모사를 선도한 천도교계와의 통일된 독립운동 계획이 이심전심 성사되었을 때, 교회에서는 이승훈의 교섭으로 장로교의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이명룡, 함태영, 그리고 감리교의 현순, 오화영,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 오기선 등 여러 목사의 참여가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장로교, 감리교를 망라한 교회 전체의 대거 참여가 약속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청년회(YMCA) 학생 중심의 운동을 계획하던 박희도나 김원백이 따로 추진하던 독립운동 역시 이 주류에 합류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3.1 운동의 거족적인 거사 준비가 통일된 주도와 그 경로를 따라서 갖추어지고, 마침내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에 교회 이사 16명 포함해 33인의 민족 대표가 서명 날인함으로써 독립만세 운동의 대열은 감동과 열의로 그 대오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회가 이 운동의 근원적 통로, 맥락이었다는 사실은 교회가 가진 국내의 뚜렷한 전국적 조직, 그리고 국외와 가진 유기적 연락 체제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났다. 평양 기독교서원의 총무이던 안세환은 동경에 가서 내각 총리대신과 그 밖의 저명한 정치이들에게 독립에 관해서 진정하기로 하고, 3월 3일 동경에서 경시총감을 만나 한국 독립에 관해서 진술하였는데, 총감은 이를 총리대신에게 상신한다고 하다가 5일에 갑자기 그를 체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평화회담에 송부하는 탄원서는 감리교 목사 현순과 전도사 김지순이 맡아 만주 안동의 김병농 목사를 통해 전달하기로 하였으며, 국내의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은 정동교회의 이필주 목사와 배재학당의 김진호가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3월 1일 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29인이 참석하여 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같은 시간에 탑골 공원에서 역시 독립 선언서가 창창히 낭독되었다.

 이 만세 시위는 당장 전국 각처에 전격 파급되었다. 평안북도의 의주, 선천, 정주, 평안남도의 평양, 진나모, 안주, 함경남도의 영흥, 원산, 황해도의 해주, 옹진, 사리원, 황주, 서흥, 연백, 수안, 경기도의 개성, 경상북도의 대구 등지에서 서울과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일시에 광분노호,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터져 나갔고,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을 거쳐 만주와 극동 노령에까지 전파되었다. 이곳 지방에서 서울과 시간적 행동의 보조를 맞출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지역들이 경의선, 경원선 등 철도 연변에 위치한 까닭도 있었지만, 민족 대표 중의 기독교 인사들이 대개 이 지방 출신자들이어서 그 교회와 관계하고 있던 사람들이 거사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요. 더구나 이 지방들은 워낙 기독교의 세력이 왕성해서 민족정신의 토양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까지도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파급"했다.

* 출처: 한국 기독교교회사 - 민경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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